1966년 늦가을부터 1967년 초봄까지 매섭게 몰아친 한파 때문에 연탄 소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연탄수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 한 장 가격이 10원에서 17원까지 대폭 인상 되었으며, 연탄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연탄 때문에 대통령이 나서서 연탄 대책을 위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장관직을 내놓을 각오로” 연탄을 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연탄이 대중 연료로 인기를 끌면서 석탄산업은 급성장한다. 1965년에는 무연탄 생산량이 연간 1천만 톤의 기록을 세운다. 생산량의 급증에도 연탄 품귀현상이 빚어지면서 전국이 떠들썩했다. 1966년 늦가을부터 1967년 초봄까지 매섭게 몰아친 한파 때문에 연탄 소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연탄수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 한 장 가격이 10원에서 17원까지 대폭 인상 되었으며, 연탄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LPG가스나 기름 같은 연료가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 대다수 가정에서 연탄을 난방 연료로 활용하고 있었다.
연탄공장 작업 광경(사진출처:국가기록원)
서울 지역 주민 대표들이 시청에 찾아가서 “연탄배급제를 공정하게 시행하라”고 항의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서울시내 곳곳에서 연탄이 귀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가 하면, 연탄 값도 부르는 게 값”(경향신문 1966년 10월 29일)이라는 기사처럼 연탄 품귀 현상은 언론마다 대서특필되었다.
정부는 연탄 품귀현상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1996년 11월 4일에는 대통령이 나서서 연탄 수급을 위한 대책회의까지 주재할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장관직을 내놓을 각오로 조속한 시일 안에 필요량의 연탄공급계획을 실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연탄 구매에 장관의 목까지 걸리면서 석탄업계는 전국적으로 초비상이 걸렸다.
통행금지(00~04시)를 시행하던 때에도 연탄을 공급하는 직종의 노동자들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병원의 응급 환자 수송을 비롯해 경찰·군인·화재 진압 등의 차량에만 허용하던 야간통행증이 연탄을 수송하는 차량에도 발급되었다. 연탄은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난방 연료인데다 연탄파동 때는 연탄 수송이 원활하지 않은 터여서 밤에도 수송하도록 한 것이다. 야간통행증 발급은 국가 전체가 나서서 긴급하게 연탄을 수송해야하는 현실을 방증한다.
연탄이 귀중한 물건으로 부각되면서 1966년 말 방송사의 ‘10대 뉴스 맞추기’ 공모 상품으로까지 등장했다. 연탄이 상품으로 등장한 것도 그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연탄 상품보다 가격이 더 비싼 라디오를 2등 상품으로 내놓았으니 대중들이 연탄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그 해 연말 동아방송에서는 지난 1년간의 ‘10대 뉴스 맞추기’ 공모를 했는데, 수만 명이 응모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목표는 일등상인 연탄 1천 장을 타보겠다는 것이다. 1천 장이라면 총 중량 4톤. 트럭 한 대분 분량이다. 온돌방이 몇 개 있어도 월동용으로 충분한 양이다. 2등 상은 ‘하이파이 라디오’였는데 값으로 따지면 연탄 1천 장 값 1만 원보다 더 비쌌다. 이때 2등 상을 탄 사람이 필자의 친구인데, 그 친구의 어머니가 연탄을 놓친 것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오원철,『에너지 정책과 중동진출』)
1966년 늦가을부터 1967년 초봄까지 매섭게 몰아친 한파 때문에 연탄 소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연탄수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 한 장 가격이 10원에서 17원까지 대폭 인상 되었으며, 연탄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연탄 때문에 대통령이 나서서 연탄 대책을 위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장관직을 내놓을 각오로” 연탄을 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연탄이 대중 연료로 인기를 끌면서 석탄산업은 급성장한다. 1965년에는 무연탄 생산량이 연간 1천만 톤의 기록을 세운다. 생산량의 급증에도 연탄 품귀현상이 빚어지면서 전국이 떠들썩했다. 1966년 늦가을부터 1967년 초봄까지 매섭게 몰아친 한파 때문에 연탄 소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연탄수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 한 장 가격이 10원에서 17원까지 대폭 인상 되었으며, 연탄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LPG가스나 기름 같은 연료가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 대다수 가정에서 연탄을 난방 연료로 활용하고 있었다.
연탄공장 작업 광경(사진출처:국가기록원)서울 지역 주민 대표들이 시청에 찾아가서 “연탄배급제를 공정하게 시행하라”고 항의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서울시내 곳곳에서 연탄이 귀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가 하면, 연탄 값도 부르는 게 값”(경향신문 1966년 10월 29일)이라는 기사처럼 연탄 품귀 현상은 언론마다 대서특필되었다.
정부는 연탄 품귀현상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1996년 11월 4일에는 대통령이 나서서 연탄 수급을 위한 대책회의까지 주재할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장관직을 내놓을 각오로 조속한 시일 안에 필요량의 연탄공급계획을 실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연탄 구매에 장관의 목까지 걸리면서 석탄업계는 전국적으로 초비상이 걸렸다.
통행금지(00~04시)를 시행하던 때에도 연탄을 공급하는 직종의 노동자들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병원의 응급 환자 수송을 비롯해 경찰·군인·화재 진압 등의 차량에만 허용하던 야간통행증이 연탄을 수송하는 차량에도 발급되었다. 연탄은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난방 연료인데다 연탄파동 때는 연탄 수송이 원활하지 않은 터여서 밤에도 수송하도록 한 것이다. 야간통행증 발급은 국가 전체가 나서서 긴급하게 연탄을 수송해야하는 현실을 방증한다.
연탄이 귀중한 물건으로 부각되면서 1966년 말 방송사의 ‘10대 뉴스 맞추기’ 공모 상품으로까지 등장했다. 연탄이 상품으로 등장한 것도 그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연탄 상품보다 가격이 더 비싼 라디오를 2등 상품으로 내놓았으니 대중들이 연탄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